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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장의 인생 '화투'

"우하하~. 쌌다, 쌌어!"

"피박에 광박까지 썼네. 경사났네."

남의 불행을 보고 마음껏 기뻐하기는 사실 쉽지 않다. 속으로는 행복해하면서도 자못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줘야 하는 것이 세상살이의 법칙. 하지만 고스톱 판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 마음껏 웃고 기뻐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훌훌 날려버릴 수 있다. 점수는 돈과 직결되는 만큼 점당 10원, 100원 짜리 푼돈이라도 그 돈들어오는 재미마저 쏠쏠하다.

이번 명절에도 어김없이 고스톱 패는 돌아갈 것이다. 아마 화투보다 바쁜 설을 보내는 물건도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과거엔 부정적인 이미지도 많았지만 요즘은 화투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다들 제 앞길 가느라 바쁜 세상, 명절때 만이라도 온가족이 둥글게 둘러앉을 수 있게 만드는 일등 공신이기도 하다.

# 고스톱, 성격이 보인다

김순복(72) 할머니네의 명절 풍경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화투'다. 할머니네 며느리가 해야 할 명절 임무 중 하나가 군용담요 하나와 화투 한 목을 챙겨두는 것일 정도라고.

웃어른께 인사를 드리고 간단한 음식을 나누며 잡담을 즐긴 뒤에는 어김없이 고스톱 시간이다. 늘 게임을 제안하는 것은 둘째 사위. "어머님, 팔운동 좀 하셔야지요?"라고 신호를 보내면 거실 한 가운데 요가 깔리고 화투패가 돈다. 사위 허성환(49) 씨는 "그냥 용돈을 드릴 수도 있지만 함께 놀아드리면서 돈을 잃어드리는 것 또한 효도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여기서 가족들의 성격이 드러난다. 김 할머니는 '소심한' 스타일. 3~4점만 되도 무조건 '스톱'을 외친다. 안정된 수입을 추구하는 형이다. 아, 들어오는 돈은 재깍 챙기지만 나가는 돈은 판이 걷힐 때까지 외상이다. 자식들 앞에 쌈짓돈 함부로 꺼내놓지 않는다. 결국 이날 판에 등장한 돈은 모두 할머니의 몫이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위는 '못먹어도 무조건 고' 스타일이다. 늘 '고'를 외치다 돈을 잃지만 꿋꿋히 '모 아니면 도'를 고집하다가 '독박'을 쓴다. 과욕을 부리는 것이라고? 물론, 큰 한판을 노리는 것은 성격이라는 것은 본인도 부인하지 않지만 잃어도 별 불만이 없다. 많이 잃어주니 김 할머니에게 가장 많은 용돈을 드리는 것도 이 사위다.

며느리 박희종(42) 씨는 '잔머리 굴리다 돈 잃는' 스타일이다. 사실 고스톱 실력으로 따지면 이 집에서 가장 '고수'로 손꼽히지만 너무 잘 치려고 자꾸 머리를 돌리다보니 오히려 돈을 잃는 날이 더 많다. 게다가 남의 패를 보고 점수 계산해 주고, 감놔라 배놔라 간섭하기에도 여간 바쁜 것이 아니다.

가장 실속 있게 보이는 것은 맏딸 김경숙(50)씨다. 사실 김 씨는 '고스톱'계에 입문한지 이제 고작 2년 남짓이다. 그것도 명절이나 가족 모임에서만 가끔 한번씩 치는 고스톱이다보니 아직도 점수 계산에는 서툴다. 그림만 맞추고 있는데로 가져오는 '막가파식' 고스톱을 치지만 광을 팔다 판세에 따라 판에 끼는 '포커페이스' 전법을 쓰기 때문에 가장 실속형이라고.

#인생사의 법칙

왜색이 짙다, 사행심을 부추긴다, 퇴폐적인 망국병이다 등의 반론도 많지만 어쨌거나 화투놀이는 '대한민국 대표 게임'의 반열에 오른 것은 분명하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 국민의 70%가 화투를 즐긴다고 할 정도니 '국민 놀이'라는데는 이견이 없을 터.

이처럼 화투가 인기를 얻는 것은 한국인의 좌식 문화와도 연관이 있다고 한다. 바닥에 상을 놓고 식사하고, 바닥에 요를 깔고 자는 전통이 배어 있어 유독 판깔기를 좋아한다는 것. 또 성인들의 놀이문화가 없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또 화투 한 목에 깔개만 있으면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간편함에다 단 한판을 돌아도 점수가 날 수 있어 한국인의 성정에 맞는 신속성까지 갖췄다.

하지만 누구나 화투, 특히 고스톱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생사의 철학이 담겨있기 때문. 내 패 한 장과 바닥 패 한 장, 그리고 뒤집는 패 한 장이 만나 갖은 경우의 수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먹을 게 없어도 '비풍초똥팔삼' 중에 어느 한 장을 잘 버리면 '쪽'을 할 수도 있다는 '버림의 미학'이 있는가 하면, 싸는 경우도 있고, 4장을 한꺼번에 가져오는 '따딱'도 할 수 있다.

 

위험을 감수하고도 '고'를 외쳐 큰 수익을 노릴 것이냐, 신중하게 '스톱'을 하고 작은 수익이라도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냐의 기로에서 선택을 잘 해야한다. 이 때 인간성도 드러난다. 상대방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스톱'을 하는 이타형 인간이 있는가하면, 혼자 잘먹고 잘살아 보겠다고 '고'를 했다가 혼자 독박을 쓰는 형도 있다. 독박형 인간에게는 '과유불급'이라는 사자성어가 딱 들어맞는다.

또 돈이 개입된 놀이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간됨을 엿볼 수도 있다. '오고가는 현찰 속에 싹트는 정'이 고스톱 놀이의 묘미 중 하나건만 빚을 남겨두지 안고 재깍재깍 청산하는 성실형이 있는가 하면,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서도 끝까지 내놓지 않고 버티는 외상형도 있다.

그 중 가장 욕을 먹는 형태는 초반에 많은 돈을 딴 후 '바쁜 일이 있어서'라며 줄행랑을 치는 형이다. 고스톱 판에서는 이런 '따고배짱형'인간을 가장 몹쓸 인간으로 손꼽는다. 돈을 잃은 사람은 언제든지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지만, 돈을 딴 사람은 판을 접을 때 까지 자리를 뜰 수 없다는 것은 고스톱계의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고스톱이 가장 민주적인 룰을 갖춘 놀이'라며 애찬론을 편 학자도 있다. 공학박사 이종호 씨는 저서 '신토불이 우리문화유산'에서 "민화투에서 피는 가진자(양반)의 재산을 증식시키기 위한 못 가진 자(상놈)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데 비해, 고스톱에서는 피로 점수가 날 확률이 50%로 '피'가 존중받는 놀이"라며 "민중의식을 대변한다"는 논리로까지 발전시켰다. 또 이 박사는 고스톱이 여타 투기와 도박과 다른 증거로 중재나 화해가 통용되는 '소당', 불공정한 놀이를 견제하는 '독박' 등의 사례를 들었다.

#화투의 기원을 찾아서

화투는 일본에서 전해진 것을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하지만 '하나후다'(花札) 역시 포루투갈 상인들이 가지고 놀던 48매 트럼프를 일식으로 바꿔 놓은 것에 불과한 것.

그럼 이 서양카드의 기원은 어디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그 원조가 '한국'이라는 주장도 있다. '도박백과'라는 논문을 쓴 P. 아놀드는 "최초로 카드를 사용한 것은 한국이며 화살 그림을 그린 갸름한 카드, 곧 투전이 카드의 시조"라고 했다. 브루클린 박물관장을 지낸 S. 크린의 보고서에도 한국의 투전이 서양카드의 뿌리일 것이라는 추정을 내 놓고 있으며, B. 이네스도 이 세상 최초의 카드는 한국의 투전이 아니면 중국의 화폐, 인도의 장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했다. 이 학자들의 추정이 들어맞는다면 화투는 온 세계를 한바퀴 돌아 고향에 다시 뿌리를 내린 셈이다.

투전과 화투놀이의 연관성은 '고스톱'에서도 드러난다. 투전놀이의 여러가지 방법 중 '소몰이'가 있는데 '고스톱 백과'를 쓴 이호광 씨는 "'고' 할 때 소몰이에서는 '이랴'하고, '스톱'할때 '워'한다."며 "고스톱이야말로 한국의 고유놀이"라는 주장을 폈다.

#나의 스타일은?

□안정적 수익 추구형-3점만 나도 '스톱'. 위험회피형이다.

□'못먹어도 고'형-과유불급형, 욕심부리다 망한다.

□잔머리형-점수 계산에는 텃지만 머리굴리다 늘 의외에 패에 당한다.

□기회주의형-광 팔다 패가 좋을 때만 낀다.

□이타적 인간형-3고, 4고 갈 수 있는 상황에도 남의 사정 고려해준다.

□따고배짱형-초반 대거 득점 후 부리나케 자리를 뜬다.

□'가리'(외상)형-지갑에 돈이 있어도 무조건 외상이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매일신문에서>